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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생성 음악이 더 좋게 들릴 때, 우리가 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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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강민훈
작성자
강민훈
BLOODMOON

어제 데모곡을 하나 만들었다. 피아노와 드럼을 대충 깔아본 뒤 베이스라인을 얹었다. 솔직히 말해 형편없었다. 클라리넷으로 찍은 멜로디는 나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준은 못 됐다.

AI 음악 생성 서비스인 Suno를 이용해보았다. 30초 만에 풀 밴드 사운드에 보컬까지 입혀진 결과물이 튀어나왔다. 깔끔했다. 듣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내 데모곡을 삭제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함정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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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현상을 AI 완성도 함정(AI Polish Trap) 이라 부르기로 했다. AI가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완성도가 창작자가 미완의 아이디어를 붙들고 늘어질 인내심을 갉아먹고, 결국 통계적 평균으로 수렴하는 결과물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음악의 질을 떨어뜨리는 현상이다.

B가 A보다 좋게 들린다. 그건 사실이다. 프로덕션의 질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드럼은 단단하고 믹싱은 매끄러우며, 보컬까지 얹혀 있으니 귀가 선호하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그 ‘좋게 들림’이 ‘좋은 멜로디’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귀는 이 둘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AI가 만든 멜로디는 방대한 히트곡 데이터에서 학습한 통계적 평균치다. 누구도 불쾌해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놀라게 하지 못하는 지점. 안전하고 평범한 방향으로 수렴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 위에 완벽한 프로덕션이 덧입혀지니, 평범한 멜로디조차 근사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함정에 빠져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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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네 가지다.

  • 첫째, 즉각적인 만족. 인간의 뇌는 지금 당장 좋게 들리는 것에 저항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다. 30초 만에 나온 깔끔한 결과물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기란 진화적으로 불리한 싸움이다.
  • 둘째, 비교 효과. 내가 엉성하게 친 피아노 데모와 AI의 화려한 프로덕션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공평한 게임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내가 굳이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회의감이 밀려오고 결국 창작 자존감이 깎여 나간다.
  • 셋째, 현실적인 압박. 마감 기한과 납품 조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빠르고 준수한 결과물은 매력적인 생존 전략처럼 느껴진다.
  • 넷째, 전문가일수록 더 취약하다. 초보자는 제 결과물에 “이 정도면 괜찮네"라며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백 곡을 써본 전문가는 자기 데모의 허점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AI가 내놓는 매끈한 결과물에 더 쉽게 매료된다.

치명적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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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은 단순한 실력 퇴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하락 루프가 형성된다. AI가 기존 곡을 학습하고, 창작자가 AI의 출력물을 최종본으로 채택하며, 그것이 다시 새로운 콘텐츠로 세상에 나온다. AI는 그 결과물을 다시 학습한다. 결국 창작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개인은 퇴화하고, 장르는 평탄해지며, 생태계 전체가 개성 없는 기성품처럼 변해간다.

스테로이드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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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헬스장에서 매일 비명을 지르며 운동하면 고통스럽지만 진짜 근육이 생긴다. 나의 투박한 데모가 바로 그 과정이다. 구리지만 진짜다. 반면 스테로이드를 맞으면 순식간에 근육이 붙는다. 빠르고 보기 좋다. 하지만 거기엔 내실이 없다. 약을 끊는 순간 근육은 사라진다. AI 결과물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건, 매일 약을 맞으면서 “나 운동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자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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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긴 글을 쓰는 게 예전보다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는가? 이메일이나 기획서, 심지어 카톡 답장조차 AI에게 초안을 맡기곤 한다. AI가 쓴 문장이 매끄러우니 그대로 전송한다. 그러다 어느 날 AI 없이 글을 쓰려고 하면 첫 문장부터 막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AI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나조차 지금 글쓰기의 주도권을 넘기고 있구나.” 이 함정은 그토록 자연스럽다. 알고 있어도 빠진다.

하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지점도 발견했다. “AI에 쓰레기를 넣으면 예쁜 쓰레기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AI로부터 좋은 결과물을 얻어내려면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고, 맥락을 구조화하며, 핵심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친구에게 카톡을 던지듯 대충 해서는 안 된다. 이 과정 자체가 실은 새로운 형태의 사고력 훈련이기도 하다. 결국 본질은 같다. 통째로 “대신 써줘"라고 넘기면 퇴화하고, 내 생각을 다듬는 도구로 부리면 확장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경계선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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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렇다면 가상악기도 마찬가지 아닌가?“라는 반론이다. 가상악기 역시 실제 연주의 섬세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열화판이다. 하지만 가상악기가 음악을 망쳤는가? 오히려 오케스트라를 고용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에게 교향곡을 써볼 기회를 열어주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가상악기는 연주를 대체했을 뿐 작곡을 대체하진 않았다. 멜로디를 구상하고 코드를 짜며 구조를 설계하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다. 가상악기가 붓의 종류를 바꾼 것이라면, AI 생성기는 그림 자체를 대신 그려주는 것이다. 도구가 표현 수단을 대체하면 창의성이 확장되지만, 창작의 의사결정까지 대체하는 순간 퇴화는 시작된다. AI를 쓸 때마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도구를 표현의 수단으로 쓰는가, 아니면 의사결정을 떠넘기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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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아예 멀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방식의 문제다. Suno의 커버 기능에 내 데모를 넣고 다양한 프롬프트를 시도해 본다. “이걸 재즈로 해석하면?”, “일렉트로닉으로 바꾸면?” 내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 여러 버전이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그 결과물을 완성품이 아닌 방향 탐색의 도구로 삼는 것이다. “아, 이 멜로디가 재즈에 얹히니 이런 느낌이구나. 여기서 이 코드 진행만 빌려와서 내 식대로 다시 만들어보자.” 의사결정은 내가 하되, AI가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주게 하는 방식이다.

또한, AI의 결과물을 듣기 전에 반드시 나만의 버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AI를 먼저 접하는 순간, 내 창의적 판단력은 오염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AI가 내놓는 통계적 평균치를 ‘피해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삼을 수도 있다. 레퍼런스가 아닌 안티-레퍼런스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반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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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을 정리하며 스스로 떠올린 반론이 하나 더 있다. “AI가 통계적 평균으로 수렴한다 해도, 그 평균이 개인의 경험치보다 훨씬 넓다면 오히려 다양성을 확장하는 것 아닌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대개 사람은 자기 취향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산다. 한국에서 자란 이는 K-pop에 익숙하고, 미국 교외에서 자란 이는 컨트리에 익숙하다. 개인이 평생 접하는 음악은 인류가 만든 음악 총량에 비하면 극히 일부다. 반면 AI는 가믈란, 그레고리안 성가, 서아프리카의 리듬까지 학습했다. 개인에게는 AI가 오히려 세계를 넓혀주는 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정확한 진단은 이럴 것이다. AI가 개인 차원에서는 다양성을 확장하되, 집단 차원에서는 다양성을 수축시킨다는 것. 모든 사람의 취향이 각자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넓어지지만, 그 넓어진 결과가 결국 서로 비슷한 지점에서 만나는 현상이다. 모두가 다양해졌지만,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다양해진 기묘한 상태 말이다.

더구나 지금은 AI가 인간의 결과물을 학습한 1세대 단계라 확장 효과가 두드러지지만, AI 생성물이 다시 학습 데이터로 쓰이는 순환이 반복되면 동질화의 압력은 본격화될 것이다. 우리가 보는 지금의 확장은 거대한 수렴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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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음악이 대중에게 깊이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사운드의 퀄리티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가사 한 줄, 멜로디의 울림 속에 아티스트만의 고유한 세계와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청중은 완벽하게 조율된 음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빚어내기 위해 창작자가 고뇌한 시간과 서사를 소비하는 것이다. AI가 통계적 확률로 구현해낸 ‘매끈한 가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 즉 결핍조차 개성이 되는 인간미의 힘이다.

때로는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소리조차 누군가에겐 위로가 된다. 그것이 기계의 계산이 아닌, 한 인간의 진심 어린 고백임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음악에 끝내 매료되는 순간은, 가장 인간다운 목소리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순간이다.

비틀즈의 ‘Yesterday’ 역시 처음부터 명곡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폴 매카트니는 어느 날 꿈속에서 들은 멜로디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급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아침 식사 메뉴를 가사로 붙여 흥얼거렸다.
“Scrambled eggs, Oh, my baby, how I love your legs.”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된 명곡의 시작은 그랬다.

좋은 아이디어는 처음엔 대개 보잘것없고 투박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단계를 기꺼이 견뎌내며, 미완의 조각을 쓸만한 보석으로 빚어내는 인내의 과정이야말로 창작의 본질이다.

우리는 AI에게 그 고귀한 고통의 시간까지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직접 생각해 낸 멜로디와 가사 한 줄에는, 당신이 일평생 마주했던 풍경과 이름 모를 감정들,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해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영혼을 건드리는 음악은 오직 인간의 시간 속에서만 숙성된다.
단 한 번의 ‘딸깍’으로 빚어낸 결과물은 결코 당신의 음악을 대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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